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로마네스크 양식 오에 성당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로마네스크 양식 오에 성당
크리스트교와 함께 서양의 새로운 문화도 유입되었습니다.
당시 아마쿠사에서 선교사 양성을 위해 '코레지오' 가 개설되었으며, 섬 내 약 2만 5천 명의 신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국적인 흉작으로 아마쿠사에서도 기근이 계속되어, 아사자가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막부의 의한 가혹한 공물 징수와 크리스트교 탄압은 계속돼 주민들은 곤경에 몰렸습니다.
시마바라 아리마촌에서 몇 년간의 과중한 공물 징수에 대한 반발과 크리스트교 탄압에 불만이 끝내 폭발했습니다.
그리고 시대는 아마쿠사 시로를 추대하여, 농민들은 봉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마쿠사, 시마바라의 난' 입니다.
시로는 불과 16세의 나이로 봉기군의 총대장이 되었습니다. 신비로운 수수께끼의 소년으로 여러가지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크리스트교 탄압과 과중한 공물 징수에 허덕이는 봉기군을 단결시키기 위해 젊은 시로를 총대장으로 내세웠다고도 합니다.
-1639년 쇄국령 발령 (제5 쇄국령)
반란으로 황폐해진 아마쿠사의 부흥에 기여한 인물이 스즈키 시게나리입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잇달아 절과 신사를 창건했습니다. 시게나리가 가장 주력한 것은 미곡의 수확량 반감이었습니다. 막부가 파견한 영주였으나 목숨을 걸고 막부에 공물 감량을 호소하였습니다. 시게나리가 죽은 후, 제2대 영주가 된 아들 시게토키 때 이것이 실현되었습니다.
요사노 히로시(텟칸), 기타하라 하쿠슈, 기노시타 마쿠타로, 요시이 이사무, 히라노 반리 등, 유명한 작가들이 크리스트교도의 사적 탐문을 목적으로 규슈를 중심으로 여행하였습니다. 일행은 아마쿠사에서 가르니에 신부를 만나 아마쿠사의 크리스트교의 역사와 이국정서 넘치는 풍부한 자연에 깊이 감동하여, 이 기행문을 '다섯 켤레의 구두' 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 후 그들의 문예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남만문학' 으로서 문예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에도막부에 의한 종교 탄압은 점점 가혹해지면서 크리스트교도에게는 긴 곤경의 시대가 계속되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겨우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은둔 크리스트교도들의 기도의 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됐습니다. 현재, 오에, 사키쓰에 건축된 성당은 치유의 장소로 지역 주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마쿠사, 시마바라의 난' 의 역사적 배경과 남만문화의 영향을 받은 귀중한 자료를 최신영상기술을 사용하여, 전시공간과 박력 넘치는 입체영상으로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트교 금지령 해제 후, 처음으로 건축된 아마쿠사를 대표하는 성당입니다. 현재의 건물은 1933년 아마쿠사에서 그리스트교를 전파하는데 일생을 바친 프랑스인 선교사 가르니에 신부가 지역 주민들과 협력하여 건립한 것입니다.
* 성당은 기도의 장소입니다. 예절을 지켜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 매주 일요일은 주일미사가 있으므로 입관을 자제해 주십시오.
* 네비게이션 이용시에는 위의 주소로 검색하십시오.
순교전 천인총(塚)과 크리스트교도의 묘지가 있으며, 혼도의 거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로야마 공원에 '아마쿠사 키리시탄관' 이 2010년 7월에 리뉴얼 오픈하였습니다. 관내에는 네 개의 전시공간이 있는데 '아마쿠사, 시마바라의 난' 을 중심으로 한 크리스트교의 역사가 현장감있고 알기 쉽게 전시되어 있습니다.